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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홍범도 논쟁은 번지수 잘못 찾은 예송논쟁

김석수 칼럼니스트

이혁주 | 기사입력 2023/09/11 [18:10]

[칼럼] 홍범도 논쟁은 번지수 잘못 찾은 예송논쟁

김석수 칼럼니스트
이혁주 | 입력 : 2023/09/1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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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석수 칼럼니스트.    

홍범도 논쟁이 소모전으로 간다.

 

문재인 정부의 홍범도 유해송환으로 또 하나의 사상내전이 만들어졌다.

 

애초에 홍범도 유해는 평양으로 가는 게 옳았다.

 

그가 태어난 곳이 평양이고 그가 신봉한 사상도 공산주의였기 때문이다.

 

북한도 그렇게 주장한다. 

 

그런데 이 논쟁이 사오정 문답으로 소모전이 되었다.

 

‘홍범도 흉상이 육사교정에 있는 것이 맞느냐’ 하는 윤석열정부 질문에, 민주당이 엉뚱하게 ‘홍범도의 독립운동을 부정하느냐’는 공세로 받아쳤다.

 

정부여당이 거듭해서 ‘그의  독립운동을 기리기에 흉상이 독립기념관으로 가는 게 맞다’고 해도, 민주당은 ‘상해임시정부에 뿌리를 둔 대한민국이기에 독립운동가 홍범도도 육사교정에 남아야 한다‘고 말한다.

 

서로 초점이 맞지 않는 말을 하고 있다.  

 

동상은 있어야할 곳에 있어야 한다.

 

특히 그 쓰임새에 따라 과거와 미래를 구분해야 한다.

 

독립기념관은 과거를 기념하는 곳이다. 그곳에 홍범도 흉상을 설치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육사는 미래에 적과 싸울 군 간부를 육성하는 인재양성소다.

 

우리의 적은 구냉전,탈냉전,신냉전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공산 체제 북한이다.

 

해서 육사교정의 공산당원 홍범도 흉상은 부자연스럽다. 

 

박정희정권도 건국훈장을 준 홍범도라는 강변도 있다.

 

독립운동을 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도 홍범도 행적중 봉오동 전투만 알려진 때였다.

 

최근 러시아 문서가 해제되고 꾸준히 이어져온 연구결과 그의 행적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특히 자유시참변에서 홍범도책임은 가볍지 않아 보인다.

 

1921년 상해임시정부 제안으로 독립군부대들이 자유(스보보드니)시에 모였다.

 

식민지해방이 자본주의 물적 토대를 허무는 일이라는 레닌은 한국 독립군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한국 독립군을 적군으로 편입시키려 했다.

 

레닌의 적군은 독립군 무장해제를 요구했고 홍범도부대 등은 순순히 따랐다.

 

그리고 이를 거부한 상해파 고려공산당부대를 적군이 무차별 공격했다.

 

이 작전엔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부대인 자유대대도 참여했다.

 

이 자유시 참변으로 4천여명에 달하던 독립군이 소멸되어 버렸다.

 

진압당한 1500여명의 상해파 고려공산당군은 죽거나 행방불명되었다.

 

체포된 수백 명은 시베리아 벌목공 등으로 사라졌다.

 

이들을 공격한 자유대대와 방조한 홍범도 부대 등은 러시아 적군으로 편입되어 소멸되었다.

 

또 참변 후 홍범도는 체포된 독립군들을 재판한 3인의 재판위원 중 한 명이었다.

 

독립군을 몰살시킨 러시아 적군에 부역한 것이다.

 

일부 좌편향 학자들은 체포된 독립군을 더 많이 구제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하지만 설득력없는 논리다.

 

그 논리대로라면 민족보전을 위해 나라를 일본에 넘겼다는 이완용도 매국노가 아니라 훌륭한 위인이 된다.

 

또 홍범도와 달리 지청천, 김좌진 부대 등도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만주로 돌아갔다.

 

그래서 당시 상황에서 볼셰비키군에 편입될 수 밖에 없었다는 논리는 어설프다.

 

해석이 아니라 사실을 보아야 한다.

 

홍범도는 그 활동으로 레닌으로부터 돈과 권총을 받았고, 1927년에 쏘련공산당원이 된다.  

 

애석한 것은 이 참변으로 우리의 연합국 지위가 불가능해졌다는 점이다.

 

비록 임시정부가 대일선전포고를 했으나 연합국지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빈약한 군사력 때문이었다.

 

그리고 해방후 대한민국은 연합국이 아니라 일제 식민지로서 신탁통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 원인 중 하나가 자유시 참변이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 봉오동, 청산리 전투 등으로 무장독립운동이 확산되던 중 터진 자유시 참변으로 4천여 명에 달하는 독립군이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나찌가 점령한 1940년에 프랑스 독립군인 자유프랑스군도 1만여명 남짓이었다.

 

꾸준히 늘어나 1943년엔 7만여명이 되었고 연합국의 일원이 되었다.

 

1921년 자유시 참변이 없었고 독립군부대들이 통합되어 임시정부군으로 편제되었다면, 해방 당시 수만 명의 독립군으로 연합국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자유시참변은 바로 그 기회의 싹을 잘라버린 비극이다.

 

김구 주석의 한탄처럼 불과 500여명의 광복군으로 해방을 맞이한 결과, 자력으로 통일조국수립이 불가능했고, 38선을 기준으로 미소 양군의 일본군 무장해제는 6.25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물론 이 모든 책임을 홍범도에게만 물을 수는 없다.

 

그러나 역사는 개별 사건보다 맥락과 흐름에서 봐야 한다.

 

홍범도의 봉오동전투 공적 못지않게 자유시 참변에서 보인 무책임과 실책도 기록해야 한다.

 

공적만 부풀리고 과오나 실책을 묻어두는 건 공정한 평가가 아니다.  

 

상해임시정부를 법통으로 출발한 대한민국은 홍범도를 ‘한때’ 독립운동했던 이로 기릴 수는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 북한을 주적으로 상대하는 군 간부 양성소인 육사교정에 공산당원 홍범도 흉상을 세우는 것은 장소를 잘못 가린 결과다.

 

통일후라면 몰라도 엄연히 공산주의와 대치하고 있는 대한민국이 공산주의자 흉상을 세워 기념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한 일이다.

 

무슨 냉전시대 이념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지금은 엄연한 신냉전시대다.

 

경제는 자본주의 원리를 받아들였으나 정치체제는 공산당 독재 국가인 중국, 그리고 공산체제 북한과 그 동맹인 러시아가 한편이 되고, 자유세계가 다른 한편이 되는 신냉전 시대다.

 

전략적 모호성이 국익이 되는 탈냉전이 끝났다.

 

따라서 홍범도 흉상은 ‘장소’뿐 아니라 ‘때’도 문제다.

 

탈냉전 끄트머리에 문재인 정부가 정치이벤트로 벌인 홍범도유해송환이 소모적 논쟁을 만들고 있다.

 

국제질서 급변기에는 기민한 분별력이 필요하다.

 

신냉전이라는 새 질서를 주도하지 못하고 또다시 끌려다니면 전술국가를 면치 못한다.

 

그러므로 전략국가, 중추국가로 나가는 시점에 미래가 아니라 과거로 돌아가는 홍범도 논쟁은 쓸모없는 소모전이다.

 

실용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예송논쟁 같은 탁상공론이다. 

 

/김석수 칼럼니스트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원본 기사 보기:동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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